시인과 촌장 인터뷰
좋은 노래의 의미를 찾아서 떠나는 새로운 항해
함께 무대에 선 시간은 짧았다. 노래가 사람들 곁에 머문 시간은 길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와 함춘호가 녹음한 1986년 [푸른 돛]에는 대구의 호텔방에서 처음 들려준 노래와 옥탑방에서 거듭한 연습, 서로의 마음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떠오르던 풍경이 담겨 있다.
시인과 촌장 45주년을 맞은 2026년, 하덕규와 함춘호가 다시 관객 앞에 섰다. 각자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음악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객석은 또 다른 사실을 알려주었다. 무대에서 자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음반 속 노래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 오래된 LP를 들고 다가오는 이들의 눈빛에서 하덕규는 기다렸던 친구를 만났다.
부평구문화재단 ASCOM 뮤직 페스티벌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두 사람에게 다시 노래하는 이유와 서로의 음악을 알아듣는 감각, 오늘날 포크 음악을 만드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대화는 바다로 향했다. 함춘호는 후배들에게 항해하는 법을 가르치기보다 같은 바다를 항해하고 싶다고 했다. 하덕규는 평생 질문해 온 좋은 노래의 의미를 관객들의 삶 속에서 찾았다.
시인과 촌장이 45주년을 맞았다. 오랜만에 함께 무대에 선 소감은 어떤가.
하덕규 적응하느라 힘들기도 했는데, 예전에 우리가 했던 기억들이 잘 되살아나 줬다. 그래서 재미있게 연주했던 것 같다.
함춘호 우리가 함께 활동한 시기는 아주 짧다. 그런데 그때 워낙 힘 있게 연습해서 그런지, 26년 만에 같이 무대를 했는데도 그때 느낌 그대로 기분 좋게 연주했다. 시인과 촌장의 음악 세계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각자의 활동을 이어오던 두 사람이 다시 시인과 촌장으로 만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하덕규 각자 바쁘게 살았다. 나도 여러 가지 일을 했고 함춘호 씨도 워낙 바쁜 생활을 했다. 그렇게 지낸 시간은 길었지만 다시 만나는 결정은 금세 했다. 내 마음에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시인과 촌장의 노래를 다시 불러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때 제주 KBS의 새 프로그램 PD님이 연락을 주셨다. 음악감독이 함춘호였는데, 그에게 전화번호를 받아 장문의 문자를 보내셨다. 그 글이 내 마음을 움직였고 다시 나설 용기를 주었다. 함춘호가 음악감독을 하는 프로그램이니 내가 도와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하고 나서도 이제부터 무엇을 해보겠다는 계획보다는, 다시 만나 옛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준 것이 기뻤다. 그런데 반응이 참 좋았다. 노래를 더 많은 분에게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분들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 아닌가. 한 장 한 장 음반을 사주셔서 시인과 촌장이 사랑받았다. 그분들을 위해 노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함춘호 덕규 형 이야기처럼 우리의 노래를 기다려준 많은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줄 때가 되었던 것 같다. 시인과 촌장의 오래된 이야기와 가사로 자기 시절을 보낸 분들이 다시 듣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바람과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나갈 수 있었다. 제주는 첫 단추를 꿰는 길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부평까지 왔다.

부평에서의 공연에는 어떤 기대가 있나.
함춘호 부평의 음악창작소에 몇 번 갔고, 좋은 곳이라는 것을 직접 느꼈다. 이번에 열린 공연을 한다는 요청을 받고 어렸을 때 봤던 외국의 공연 영상이 떠올랐다. 온 가족이 나와 돗자리를 깔고 함께 보는 포크 공연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런 음악을 시인과 촌장이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내 주 활동 무대가 부천이어서 가까운 부평에서 일어나는 문화적인 일들을 알고 있다. 부평구문화재단이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하고 청년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청년 포크 문화가 다시 움직인다는 것이 느껴지고, 그 시작점의 한 중심에 부평구문화재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기서 만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만남이라는 생각이 든다.

[푸른 돛]을 함께 만들기 전,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나.
하덕규 나는 1981년에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함춘호 그전에 만났다니까!
하덕규 함춘호 씨는 아마 1980년에 나를 봤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1981년 종로의 통기타 클럽이다. 한 건물에 업소가 1, 2층으로 있었는데, 1층에서는 나와 시인과 촌장의 첫 멤버가 듀오로 노래했고 위층에서는 함춘호 씨가 전인권 씨와 듀엣을 했다. 오가며 친하게 지냈고, 인권이 형을 따르며 같이 놀았다.
이후 서로 각자의 길을 갔다. 나는 곡을 쓰고 책을 읽었고 함춘호는 대구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했다. 그런데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함춘호의 기타가 엄청나졌다고. 춤추러 가는 게 아니라 기타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나는 새 앨범을 만들려고 레코드 회사와 계약한 상태였다. 한 선배가 파트너로 함춘호는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 형에게 “갑시다!” 하고 대구로 내려갔다. 나이트클럽에서 함춘호를 만난 뒤 호텔방에서 그동안 썼던 노래들을 들려주며 같이 하자고 했다. 며칠 안으로 기꺼이 올라왔고, 옥탑방에 모여 연습하고 편곡하면서 음반을 준비했다.
함춘호의 기타가 하덕규의 이야기와 잘 맞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나.
하덕규 나는 노래를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함춘호는 돌아봐도 참 적절한 파트너였다.
나는 외국 팝보다 한국 선배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조동진, 김민기, 정태춘, 최성원, 양희은, 한대수 같은 분들이다. 특히 최성원 선배가 관심과 격려를 많이 보내주셨다. 내 음악과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도록 도와줄 뮤지션을 만나면 잘될 거라고, 좋은 음악가라고 용기를 주셨다.
곡을 쓰면서 편곡에 대한 막연한 아이디어는 갖고 있었다. 어떤 뉘앙스를 품고 사람들에게 갔으면 좋겠다는 그림도 있었다. 다만 그 그림을 음악적으로 세세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협업을 간절히 원했다. 그렇게 만난 파트너가 함춘호였고, 정말 적중했다. 함춘호가 아니었다면 이 앨범이 이런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기타가 아름답다.
그때 노래는 어떻게 찾아왔나.
하덕규 항상 어디선가 노래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모티브는 내 안에서 만들어내기보다 밖에서 오는 것 같다. 살면서 스쳐 가는 생각, 눈앞의 작은 풍경,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런 것들이 내 눈과 마음에 날아와 앉는 듯하다. 그 모티브를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그것을 성실하게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며 시를 쓰고 적절한 멜로디를 준다. 그것이 내 작업의 전부다.
함께 작업할 때 말로 많은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나.
하덕규 알고 보니 어린 시절 자란 고향이 거의 옆이었다. 강원도 동해 바닷가에서 차로 10분, 15분 떨어진 마을에서 자랐다. 지금도 그쪽 사투리를 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크다. 서로 예민하고 서정적인 느낌이 있다.
우리는 음악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았다. 이 곡을 이런 마음으로 썼다고 말한 적이 거의 없다. 그냥 이야기를 주면 함춘호가 기타를 입혔다. 그렇게 기타를 중심으로 한 사운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정이 담겨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당시에는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 가야 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함춘호 곡을 들었을 때 그림이 보인다고 하지 않나. 보통 연주할 때는 여기를 어떻게 잘 쳐야겠다고 생각할 텐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음악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떤 모습과 분위기가 보이고, 이 음악이 주는 느낌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서로 느끼고 가진 공통점이 있었을 것이다.
덕규 형이 말한 “적당히 예민하고 적당히 서정적이고”라는 문장이 우리를, 나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말 아닐까.

그렇게 만든 앨범을 발표하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하덕규 우리는 음반을 내자마자 헤어졌다. 나는 당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함춘호에게 앞으로 가스펠 음악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대중음악 활동을 접기로 마음먹었던 때였다. 함춘호 씨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 그를 필요로 하면서 세션 연주자로서 길이 열리고 있었다.
다투거나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길이 달라졌다. 음반을 내고 활동해야 할 시점에 삶의 급격한 변화가 생겨 각자의 길을 간 것이다. 얼굴 붉힌 적 없이 좋게, 덤덤하게 헤어졌다.
함춘호 덕규 형은 기독교를 만났고 나는 집사람을 만났다. 만난 대상이 달랐다.
하덕규 사랑을 만난 거지!
함춘호 둘 다 사랑을 만났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고 덕규 형은 신앙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로 갔다. 그래도 음악으로 이어지는 고리들은 꾸준히 있었다. 헤어진 듯 헤어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덕규 형이 학교에서 한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고, 그 고리를 따라 나도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자문을 구하며 계속 만났다. 같은 무대에서 음악을 하지 않았을 뿐 음악을 매개로 다양하게 만나왔다.
지금 다시 듣는 [푸른 돛]은 두 사람에게 어떤 앨범인가.
함춘호 대구에서 덕규 형을 만나고 이후 공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여정이 담긴 앨범 같다. 처음 노래를 듣고 받은 감동 그대로 만나고 연습했다. 덕규 형이 들려준 음악의 느낌을 앨범에 실었고, 그 느낌으로 공연을 마쳤다. 무언가 꾸민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아온 우리 이야기다.
지금 들어도 좋다. 촌스럽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음악을 듣고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서 이 시가 다시 불리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포크 음악을 만드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함춘호 무엇을 이야기할 게 없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배운 것이 아니라 보고 느낀 대로 말하고 음악하는 법을 배웠다. 지금 친구들도 그런 것 같다.
오늘 만난 친구에게 포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진실한 가사를 이야기하고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곡을 어떻게 만드느냐고 하니 음악이 찾아온다고 했다.
지금 포크 뮤지션을 꿈꾸는 세대에게는 분명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굳이 폼을 잡을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의 항해를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바람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같은 바다를 항해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시 만나는 관객들에게 어떤 노래와 공연을 들려주고 싶나.
하덕규 좋은 노래란 무엇인가를 평생 질문하는 것 같다. 좋은 노래를 부르는 일은 나 혼자만의 소명은 아니다.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연에 왔던 분들을 제외하면 많은 분이 공연을 보지 못하고 음반으로만 노래를 들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노래들이 그분들의 삶 속에서 대화하고 머물며 함께 살아온 것이다. 이번에 공연장에서 얼굴을 보고 느꼈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세월을 건너 만났는데도 옛 친구처럼 느껴졌다. LP에 사인을 받으러 오는 분들의 얼굴과 눈빛, 표정을 보니 너무나 기다렸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 나이까지 좋은 노래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지만, 좋은 노래는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머무는 것이다. 더 마음에 와닿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 내 마음도, 이 시대의 마음도 부지런히 살피며 호흡하고 싶다.
공연장에 오실 때 정말 좋은 옛 친구를 만나 시원한 물 한 잔 마시며 대화하는 것처럼 오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끊임없이 좋은 이야기, 진실하고 착한 이야기를 노래하겠다.
함춘호 음반으로만 접하고 공연을 보지 못했던 분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궁금할 수 있다. 그 앨범을 만들었던 느낌과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가끔 만나더라도 그 모습을 표현하고 싶어서 공연을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다. 관객과 재미있게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음악이 가진 정체성을 잘 전달하는 것을 많은 분도 바라실 것 같다. 덕규 형이 그 소리와 느낌을 전할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하고, 좋은 연주자들과 정말 좋은 공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