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SUMIN) [dinnermode]

권태와 안온함이 오묘하게 대치하는 도시

수민(SUMIN) [dinnermode]

수민의 첫 정규 앨범은 2018년의 [Your Home]이었고 타이틀곡의 제목은 ‘너네 집’이었다. 좁은 방 한편이든 널찍한 펜트하우스에서든 반짝이는 별천지로 데려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재능 넘치는 창작가들과 함께하는 서울의 밤은 영롱한 가능성으로 반짝였고,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줄 것만 같은 영감의 분수대에서는 달콤한 선율이 설탕물처럼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사랑과 욕망, 불안과 쾌락의 감정을 기묘하고도 과격하게, 놀랍고도 안전하게 뒤섞었다. 

음악의 창작권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기에 수민은 어떤 공간이든 마음대로 어지럽히고 정리정돈을 하며 편히 몸을 누였다. [OO DA DA]로는 지구의 경계를 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시치미] 속 ‘옷장’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도저히 가만둘 수 없는 재능이었다. 서로 다른 음악가의 세계에 들어가 그들에게 필요한 표정과 목리소리를 만들며 프로듀서 수민의 이름은 더욱 선명해졌다. 에스파의 ‘아마겟돈(Armageddon)’에서의 음산한 SF 디스토피아 언어와 키키(KiiiKiii)의 ‘팝 오프 팝 오프(Pop Off Pop Off)’ 속 2010년대 전자 팝의 번쩍거리는 쾌감, 아이유의 ‘이 별로부터’에서의 우주적 감각으로부터 만능의 음악 유전자를 눈치챌 수 있었다. 

8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정규 앨범 [dinnermode]에서 수민은 어디에 있을까. 내로라하는 음악가들과 함께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다른 사람의 우주를 만들고 돌아온 창작가는 불 꺼진 식탁 앞에 앉아 있다. 밥상은 조촐하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레토르트 음식 포장지를 뜯는다. 매번 다 해치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켠다. 괜히 헛한 기분에 언제 사둔 줄 모르는 와인 한 병을 비운다. 번잡한 클럽에서의 파티와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의례적인 대화는 희미한 오늘 하루처럼 옅어져 간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려야 한다. 그게 꿈보다 더 꿈같은 서울의 삶이다.

[dinnermode]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가까이서 찍은 수민의 다큐멘터리다. 햇살이 잘 드는 집에서 잠깐 피우는 담배, 친한 친구들과의 조촐한 술자리, 연인과 나누는 무심한 대화가 흔들리는 화면에 스쳐 간다.

누구보다 스펙트럼 넓은 음악을 만드는 수민이 발을 딛고 있는 서울은 나른하다. ‘그냥’에서의 애매한 상태처럼 창작의 정수가 모두 빠져나간 공백과 잔여를 들여다보는 아홉 곡이 담겨 있다. 화려한 야경이나 극단적인 경쟁, 근사한 소비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은 수민이 만드는 세계에만 있다. 반대로 수민이 살아가는 서울은 권태와 안온함이 오묘하게 대치하는 도시다.

모든 노래의 작사 작곡, 프로듀싱을 도맡았다는 사실만으로 이 앨범의 대단함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작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능력보다 굳이 무언가를 더 하지 않아서 매력적이다. 슬롬(Slom)과의 성공적인 협업 [MINISERIES] 이후 수민은 안으로, 친근하게, 내밀하게 음악을 만들고 있다. MPB의 유연한 그루브, 알앤비의 느슨한 호흡, 힙합 비트가 공존 지대를 구축한다. 독특한 싱코페이션으로 롤러코스터의 ‘Love Virus’를 연상케 하는 ‘무표정’과 잘게 쪼갠 미니멀한 전자음과 소리의 공백을 절묘하게 활용하는 ‘그냥’은 섬세한 수민의 세공법이 빛나는 곡이다.

특히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나른한 지펑크(G-Funk)적 요소를 활용한 얼터너티브 알앤비 ‘Taxi Talk’다. 랩에 가까운 수민의 나레이션과 중독적인 후렴을 가지고 2분 33초라는 짧은 시간에 모르는 사이에서 깊은 관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긴장감을 풀어냈다. 바삐 달리는 택시 안에서의 어지러운 공기를 소리로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수민의 음악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재미있다.

노랫말은 일상의 말투에 가까워졌다. 영어 가사는 딱 필요한 만큼만 썼다. ‘WOO’나 ‘크림빵’의 아찔한 도발이나 ‘눈치’와 같은 은근한 유혹은 ‘성인가요’의 성숙으로 무르익었다. 관심 없는 듯 무던한, 그러나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듯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어두운 조명 하나만 켜놓고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잡고 천천히 스텝을 밟아 보는 ‘LOVESONG’에서 마음이 끓는 나는 아직도 청춘을 바라고 있는 걸까. 

[시치미]의 원숙함과 [MINISERIES] 시리즈에 익숙한 수민의 팬이라면 [dinnermode]의 ‘방해 금지 모드’가 정겹다. 반면 [Your Home] 이후 8년 만의 정규 앨범이라는 의의와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음악 설계자로서의 수민을 기다렸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일상을 충실하게 옮긴 만큼 곡과 곡 사이가 좁은데, 담담한 관찰과 독백만큼이나 직설적이고 과감한 장면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그런 시선으로 봤을 때 앨범의 메인 싱글 ‘+82’와 ‘성인가요’가 너무 건조하고 9곡 26분 구성은 짧다.

대단한 깨달음 혹은 혁신적인 시도는 이 앨범과 거리가 멀다. 대신 일깨우는 건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도시에서의 반복되는 삶이다. 앨범을 닫는 ‘침몰’에서 수민은 "이 지옥이 너라면 괜찮아 기꺼이 걸어 들어갈게."라 처연히 노래하며 또 하루의 순간을 흘려보낸다. 나는 이를 도시에 바치는 고백으로 읽는다. 못된 말만 골라 건네고 욕망을 숨기면서, 모든 가능성을 약속한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도 결국 나를 안아주는 도시, 서울을 향한 헌신으로 말이다.

오늘은 무엇이 즐거웠을까, 무엇이 지겨웠을까,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건 무엇일까. 수민은 그렇게 서울에서 음악가로 살아간다. 음악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한다. '잠들기엔 조금 이르고 하루를 더 시작하기엔 조금 늦은' 애매한 시간에 깨어나 음악을 들으며 생각한다. 오늘은 또 어떻게 끼니를 때워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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